나를 잊지 마세요(forget-me-not)

있는데 없다고 말해서 아프다. 아픈데 괜찮다고 말해서 곪는다. 당신의 상처는 열린 문. 그 문을 통해 저쪽 세계의 것 들이 밀려들어 온다. 그들은 언제나 목소리를 요구한다. 당신의 몸을 관통하여 이쪽 세계의 공기를 울린다. 이 떨림은 생생하다. 떨고 있는 당신은 안다. 문은 닫히지 않는다는 것을. 잊는다고 해서 잊히지 않는다는 것을. 벌어진 상처로 호흡하는 법을 배운다. 숨이 드나드는 길이 하나 더 생긴다. 이 길은 당신만이 아는 길이다. 숨결이 고통을 환기한다. 할퀴듯이 지나가는 기억이 삶을 증명한다. 당신은 살아 남았다고, 그 모든 사건과 더불어 지금 여기 살아 있다고 말한다.

이 감각이 말하는 방식은 독특하다. 당신의 손가락을 빌려 펜을 쥐고 무언가 써 내려간다. 풀려나오는 목소리는 알 수 없는 필기체로 새겨진다. 면류관의 가시처럼 뾰족뾰족한 선 끝에 슬픔이 맺힌다. 찌릿찌릿 전류가 흐른다. 읽는 사 람은 느낌으로 안다. 이해한다. 통상적인 읽기는 불가능하지만 다른 방식의 읽기는 가능하다. 여기 있다. 떠나지 않는다. 부재(不在)라는 말에 숨어 있는 있음(在)을 드러내는 것. <Days>와 <Nights>에서 그리듯 써 내려간 이야 기가 가리키는 진실이다.

나혜령의 <Never Leave> 연작은 은회색 잿더미다. 손을 갖다 대면 온기가 느껴진다. 켜켜이 쌓인 시간을 헤치고 날아오른 불사조. 그의 날갯짓이 남긴 흔적이다. 흐트러진 재의 모습에서 밤 사이 일어났던 죽음과 재탄생의 순간이 떠오른다. 휘몰아침, 몸부림, 그리고 고요.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맞는 새 아침. 그렇게 삶이 이어진다.

부서지기 쉬운 존재로 태어나 어김없이 무너짐을 겪는다. 그러곤 다시 몸을 일으킨다. 살아간다. 이것이 어떻게 가 능할까? 생각할수록 기이하고 놀랍다. 어디선가 불가사의한 힘이 작용하고 있다. 그런데 이 힘이 외부에 있는 것 같지 않다. 당신의 가슴속에, 가장 어둡고 깊은 곳에 마르지 않는 샘처럼 빛의 저장소가 있다. 거기서 출발한 빛이 미로 같 은 밤을 헤매며 출구를 찾는다. 기어이 찾아 낸다. 두터운 망각의 표면을 뚫고 나온다. 아파도, 진실할 수 있어서 다행 인 순간. 그런 순간들을 통과하여 이곳까지 왔다.

떠나지 않는 밤과 그 밤을 밝히는 희미한 빛. 나를 잊지 마세요. 몸 안에서 울려 퍼지는 익명의 목소리. 의식과 무 의식의 경계에서 피어나는 물망초(forget-me-not) 같은 그림들. 나혜령이 살아 낸 시간 위에 나의 시간을 포갠다. 잠 든 이의 이마를 짚듯이, 가만히. 달싹거리는 입술을 느끼며. 

홍예지 미술비평